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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론/인생

反노력론

()노력론

(당신의 노력을 살리는 기술)

 

 

 

   “거기 열심히 달려온 당신 계속 달릴 셈이신가?“ 수 많은 학생들이 수능을 망치고 재수의 길로 들어선다. 재수 괜찮다. 재필삼선이란 말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삼수에 들어선 당신 삼수를 하기 전에 이 글을 한번 읽어 달라. 아마도 당신은 원하는 만큼 성적이 안 나왔기에, 삼수에 도전하려 하는 것일 것이다. 과연 당신의 안 좋은 과거의 결과는 전적으로 노력 부족에 기인하는가? 자칭 노력론은 70~80년대 통용 되던 말로 개천의 용이 되고자 하는 학생들에게 용기를 주는 말이었다. 그 당시엔 대학에 나온 사람은 별로 없었으며 누구나 공부에 일정량의 노력만 투입하면 좋은 대학과 좋은 직장을 가질 수 있는 시절이었다. 당시는 경제발전 시기로 정치적으로 표현의 자유는 없었지만, 노력하는 자에겐 많은 기회가 있었고 그에 상응하는 경제력을 갖출 수 있었다. 이 말은 곧 개인의 인생의 결과는 개인의 노력으로 인한 결과이기에, ”전적으로 개인의 인생의 책임은 본인에게 있는 것이다라는 말과 동어이다.

 

   이제 시간을 거슬러 올라와 201611월로 와 보자. 당신은 노력론이라는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말로 당신을 억압하고 있을 것이다. “.. 좀 더 노력했었으면....” , “..그때 슬럼프만 아니었어도이런 말을 하며 스스로를 옥죄고 다시 한번 신발끈을 묶고 달리자 할 것이다. 이렇듯 수 많은 학생들을 보면 노력론은 아직도 이 시대에도 통용되고 지배적인 생각이다. 수 많은 학생들이 노력이 부족했다며 자책하고 있으니 말이다. 나는 이런 학생들이 너무 안타깝다. 과거의 시대적 흐름의 논리에 억압되어 아직도 모든 결과의 책임을 본인에게 돌리고 있으니 말이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보겠다. 경마장에 5마리의 경주마가 있다. 아마도 이 말들 중에서는 1등은 당연히 열심히 달린 말이 1등을 할 것이다. 이제 경주마를 늘려서 100마리가 있다고 해보자. 이제는 웬만큼 노력해서는 안 된다. 죽어라 달려야 겨우 1등을 한다. 이제 경주마를 1000마리가 있다고 해보자 이제는 죽어라 달려도 안 된다. 죽어라 달린 말들 중에서 몇몇 말은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야 하고, 몇몇 말은 당일 컨디션이 안 좋아야하고, 몇몇 말은 기수가 어설퍼야한다. 이래야 1등 말이 탄생한다. 경쟁자가 적을 땐 노력 외적 요인이 변수로 작용하지 않지만, 경쟁자가 늘어나게 되면 노력 외적 요인이 변수로 작용하게 된다. 여기서 전제는 모든 말들이 웬 만큼의 노력을 한다는 것이다. 이를 한 마디로 표현 한다면 경제학적 용어로 시장포화상태라고 한다. 즉 경쟁자가 적을 땐 적은 노력으로도 많은 경제적 산출을 기대할 수 있지만, 경쟁자가 많다면 그 만큼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하고, 이에 대한 경제적 산출이 작을 확률이 높다. 현재 대한민국의 수험생은 58만 명이다. 이 중 재수생 이상의 학생이 1/4을 차지한다. 여기서 노력하는 사람들을 추려 봐도 상당한 숫자이다. 마치 위에서 말한 1000마리의 말이 달리는 상황과 같다. 이 같이 시장포화상태에서는 노력만으론 부족하다. 수능 당일의 이 필수적이다. 누군가는 시험 당일 당신을 위해서 돌부리에 걸려서 넘어져줘야 된다는 말이다. 이렇게 본다면 수능을 상당히 합리적인 시험이 아니다. 모든 결과의 요인이 당신의 온전한 노력이 아니라 운이라는 노력으로 극복할 수 없는 요소에 의해 좌우되니 말이다.

 

   당신은 왜 이처럼 시장포화적 상태인 수능 시험에 도전하는가? 의사가 되려고 하는가? 그대 가슴에 진심으로 물어라. 나는 왜 의사가 되려고 하는 것일까?”, “단지 부모님이 의사이기에 이 길로 가려는 것이 아닌가?,” “사람들에게 의사라는 직업이 선망의 대상이니깐 하려는 것이 아닌가?” 우리의 교육은 이 같은 질문의 부재를 야기했다. 시장적 수요에 맞춰 공급한다는 미명 아래 강제적인 억압식 교육이 이루어졌다. 사방팔방으로 뛰쳐나갈 능력과 재능이 있는 아이들에게 한 가지 혹은 서너 가지틀로써 아이들을 재단하고 순위를 매긴다. 뒤쳐진 자들은 그냥 실패자일 뿐이다. 이제는 당신의 가슴의 기준에 따라 삶의 가치를 매겨야 한다. 제발 입시에 실패했다면 잠시만 멈춰 달라. 이제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질 차례이다.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질 능력이 없다면, 다양한 사람을 만나길 바란다. 내가 그 동안 속한 삶의 영역에서 벗어나 보기 좋은 넉살로 아무에게나 말을 걸어보고, 자문을 구하시라. 그들은 외국인일 수 있고, 시장의 장사꾼일수도 있고, 교수일 수도 있고, 소방관일 수도 있다. 그 후 당신은 깨달을 것이다. 수능은 누군가의 말대로 인생의 작은 점에 불과했었다고...

 

   누군가는 인터넷에 떠도는 대입에 성공한 엄청난 수기들을 보고, 나의 말을 패배주의적이고 자기합리화적 말이라고 오해할지도 모른다.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수저론처럼 태어나자 모든 것이 결정되었다는 따라서 노력할 필요조차 없다는 패배적인 말이 아니다. 세상에는 노력만으론 안 되는 것이 분명 존재하고, 노력의 한계성도 분명이 존재한다. 또한 각자 지니고 태어나는 것도 다르다. 우리는 분명 노력의 한계를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러니깐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각자 지닌 것을 가지고 현재 단계에서 한 단계 올라가자는 실존적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영웅적 허영심의 발현이 아니라, 나 자신을 한 단계 높이면 된다는, 하루하루 조금씩 변화면 된다는, 소시민적 자기합리적 실존적인 말이다. 재수를 했는데 당신의 대학 레벨을 고3때보다 한 단계 올렸다면 그냥 그대로면 되는 것이고, 죽을 만큼 노력했는데 오히려 수능 성적이 떨어졌다고 하더라도 그 과정 속에서 내가 한 단계 성장했다면 그것으로 된 것이다. 우리는 결과와 타협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결과가 더욱이 운에 의해 결정될 확률이 높다면 말이지요. 대학 합격 수기에 나오는 급격한 성적을 올린 사람은 몇 천 분에 일이 뿐입니다. 이제는 인생이라는 경주에서 한 길로만 달려서는 안 됩니다. 한 길로만 달린다면 누군가는 뒤쳐져야 하고, 결승선을 통과하는 사람은 소수일 뿐입니다. 삶의 모든 방향성을 고려하세요. 정말로 진부한 말이지만 이 말을 한번 되새기셨으면 합니다.

 

-단 수능이 정말 자신의 길이라면 그 길 위로 다시 뛸 준비를 하셔야 합니다.

 

-급하게 쓴 글이라 오타가 존재할 수 있습니다.